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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 이상없음] 12시의 도밍게즈 3부

유은-333 2024. 11. 6. 22:10

*3부는 유료 공개입니다.*

*본 플레이 로그에는 팀 라퓨타 - 12시의 도밍게즈 2부의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형이 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이는 시나리오의 저작권과 의도를 해칠 의도가 없었음을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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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 OF CTHULHU 7TH EDITION
2024.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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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도래했습니다.
신문과 뉴스, 인터넷 기사를 구별치 않고 모든 매체에서 도밍게즈의 평화 를 떠들었습니다.
2053년 새해의 길거리는 유난히 사람으로 북적였어요.
멸망을 넘어, 새로운 계절.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못한 날씨에도 사람들은 신사에 들리고, 기도를 올리고, 골목을 뛰놀고, 벚꽃을 즐기며 삶을 찬미했습니다.
예언의 탑이 기운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타이머와 카운터를 능가할 예언가는 없다.
DOT의 의견은 예언의 탑보다 정확하다.
신뢰는 녹지 않는 눈처럼 쌓였고 타이머와 카운터, 덩달아 DOT의 입지까지 얼음처럼 단단하게 굳어 갔습니다.
7년이 흐르는 동안 타이머와 카운터가 필요할 정도로 다급한 사태는 거의 없었습니다.
폭스트롯과 제이슨은 자잘한 사건, 사고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 TV와 같은 매체에 얼굴을 팔고, 구원 외 다른 임무에 배정되며 한가로이 지냈습니다.
음... 물론 제이슨은 파트너가 필요한 일에만 어쩔 수 없이... 참가 했었죠?
제이슨:(그랬겠지... 굳이 우리가 안 나서도 되는 일에 가지 말라고 분명 말도 했었는데.)
더해서... 폭스트롯과 한 자리에 오래 같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다는 쪽이 맞았을 겁니다.
일을 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폭스트롯은 꼭두새벽에 나가 깊은 새벽에 들어오고 있었으니까요.
숙소에서는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일도 없고… 함께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에만 잠시 마주할 정도입니다.
한쪽이 바쁘게 지내건 말걸… 도밍게즈는 건국 이래, 유난히 평화로운 한때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그 날 아침은… 그러니까…
오랜만에 폭스트롯이 숙소에 남아 있을 때입니다.
잠을 자긴 했던가요?
부엌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끓는 물 소리에 눈이 떠집니다.
제이슨:(몇 년째 익숙하게 푸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
...뭐야?
안쓰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밖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오늘은 일이 없는 모양이에요.
아니면 조금의 시간적 여유가 난 모양이죠?
제이슨:(부스럭대며 방에서 나오더니 한참을 빤히 소리의 원인이나 바라봤다.) ...웬일로 이 시간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 폭스트롯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개 돌려 당신을 잠시 보는 듯 했다가 어깨나 으쓱이는군요.
폭스트롯:가끔은 일 없을 때도 있는 거지. 커피 내려뒀으니 마셔.
제이슨:...오랜만에 들어와서 잠이나 자나 싶더니 웬 커피. 내 거라면 고맙게 마시겠지만...
너 하는 걸 보면 일에 파묻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돈데. (미심쩍은 얼굴로 다가가 잔을 집어든다.)
폭스트롯:... 너 주려고 내린 거야. 난 차면 충분하니까. (옆에 두었던 머그잔 손가락으로 톡 쳤다. 따뜻한 차라도 담긴 듯 연기 모락모락.) 타이머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은 아니야. 내가 알아서 일 늘리고 있는 거니까. 구원자 역할 자처하고 있는 거 아니니까 네가 신경 쓸 것도 아니고.
제이슨:그 말대로 차라리 요구에 따르는 일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줘야 하나?
내 얼굴이 몇 년째 보기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건 알겠는데, 새벽바람에 왔다갔다 하지 말고 잘 시간엔 자. 나라고 신경 안 쓰이는 거 아냐.
폭스트롯:네 얼굴 장시간 보고 있는 것이 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너 때문에 안 들어오는 거 아니야.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것 뿐이라 잘 시간 좀 줄인 것 뿐이다. 새벽에 잠이라도 깨웠나? 다음엔 더 신경 쓸게.
제이슨:그렇다고 눈치보고 숨죽이라는 소리도 아닌 건 알 테고. 할 일이 뭔지 알려 줄 생각도 없는 거야?
폭스트롯:예전부터 하던 일의 연장선인데... 다시 입 밖으로 꺼내면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우리 이런 비슷한 이야기 나오면 좋게 이야기 마무리 된 적 없으니까. 그래도 괜찮으면 알려줄게.
제이슨:(작게 한숨 쉬고는) ...어차피 날 어떻게 생각하든 네가 들을 생각 없잖아. 예전도, 지금도. 꼬투리 잡지 않을 테니 말해봐.
폭스트롯:(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찻잔 들어서 한 모금 넘겼다. 입술 달싹.) DOT를 갈아 엎을 생각이야. 8년 전부터 해왔던 일이고 막바지나 다름이 없어. 이미 지은 죄를 부정할 생각도 없으니 온전히 이곳의 이들의 힘으로만 설 수 있게 만들 예정이야. (들을 생각이 없던가. 한창 입 다물었다.) 너희의 손을 빌리는 일 없게.
제이슨:실행에 옮긴 놈들 보다 너희가 낫다는 보장도 없겠지만, 가타부타 않기로 했으니 나도 말릴 생각은 없다고 해두지. (잔에 든 액체를 가만히 내려다만 본다.) ...우리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이곳...의 군인이라고 보긴 어려울텐데. 그렇다면 이쪽의 거취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이들인데.
폭스트롯:... 일을 저지른 이들이나 그들이 저지른 죄악 밑에서 평화나 누리고 있던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네 입장에서는 그들이나 우리나 저기의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을 포함하여 모두 똑같잖아. (공평하네. 그리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게 편하다는 듯 보였지마는.) 너희가 돌아갈 방법도 찾고 있어. 성과는 크지 않지만... 뭐,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에 위가 모두 갈아치워지면 알아서 지낼 수 있게 해줄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이들과 원하는 것을 하며 지내도록 해. 지긋지긋하잖아, 여기.
제이슨:...잘 알면서도 네 말과 행동이 반은 다르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곳이 네 고향이니 과한 사명감까지는 이해해보겠어.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래? 그게 의미가 있나. 여기가 지긋지긋하다고 해서 도밍게즈의 다른 곳에서는 마음 편할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거고.
돌아간다, 라... 슬슬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야. 내가 살던 곳이. (정말로 다 잊은 것도 아니지만. 헛웃음이나 지으며 소파에 몸을 늘어뜨렸다.)
폭스트롯:여전이었다면 네 기분에 모든 것 맞추어 주었을 텐데. ... 아닌가. 사실은 반대였나. 내 억지에 네가 어울려 주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서 깨달아봤자지만. (매번 드는 생각이다. 넌 정말 이런 나를 좋아하긴 했던 건가? 이마저도 나에게 맞추어 준 것일 뿐 아닌가? 단정했던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잡혔다.) 맞아. 적어도 더욱 지긋지긋한 이들 얼굴 직접 보지 않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뜻이야. 너도 그 쪽이 편한 거 아닌가? 하기 싫은 일 끌려 다니지 않아도 괜찮고, 만나기 싫은 이들 만나지 않아도 괜찮고, 감정 소모도 덜하니 피로하지 않을 거야.
... 그래서, 완전히 멸망했다고 하면 그거 믿고 여기 눌러 앉게? (반쯤 남은 차를 대충 싱크대에 부어 버리더니 의자에 올려둔 제 제복 겉옷 들었다.) ... 갈게.
제이슨:(미약하게 인상을 쓴다.) 그조차도 어차피 의미 없는 물음이잖아. 지금 네 앞에 있는 내가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니까. ...그래도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네. 예전의 내가 어땠든, 나라는 인간 자체에 손 댄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널 대하는데 적당히 어울리겠다는 생각으로 받아주진 않았을 테니까.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나 싶겠지만, 네가 좋아했던 제이슨 데이라이트의 진심을 의심할 거라면 적어도 내 앞에서는 하지 마.
이후의 문제는 다른 녀석들하고 의논할 문제니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 해봤자려나. ...갈 곳 잃었다는 확신이 들면 둘 중 하나지. 이곳에서 원망하다 죽든가, 빈 세계로 건너가 잿더미 끌어안고 죽든가.
(물끄러미 일어나는 이를 올려다본다.) ...일 없다더니.
폭스트롯:답 돌아올 일 없고 어떤 답이 돌아오든 아무래도 좋아. 네가 날 진심으로 대했든 아니든, 지금의 우리에겐 의미 없는 일이니까. 과거는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 않으니... 상관 없어. (눈동자 일렁였다. 이미 붉어져 까진 제 눈가 다시 두어번 문지르더니 한숨 내쉰다.)
그건 너희끼리 이야기 해서 정해. 어차피 여기 이들의 의견은 하나고 변할 일은 크게 없으니까. 적어도 나는 내 뜻 굽힐 생각 없다. 굽히게 하고 싶으면 꺾는 쪽이 빠를 거라는 것 즈음은 너도 알겠지. 적어도 너한테는 내가 없는 쪽이 편할 테니.
... 보고 들으러 애쉬한테 갈 거다. 너희 일로 연구 해주고 있어.
제이슨:그런 말 하면서 그런 얼굴 할 거면 우릴 전과 같지 못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따져. 아니면 고분고분 따르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와버린 나를 대놓고 원망하든지. ...우리 관계가 네가 기억하는 그대로 여전했으면, 많은 게 달랐을 거라고 생각해?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거야.
난... (조금 울렁이는 시선을 내린 채 한풀 꺾인 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을 꾸미느라 얼굴 못 비추는 것보다 누구 하나라도 옆에 있는 쪽이 나아. 줄곧 이야기 했잖아.
우리 일이라면 나도 데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폭스트롯:다른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 그런다고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고. 넌 그 순간 네가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니 결과가 어떠하든 순응하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하는 쪽이 좋지 않나. ... 글쎄. 적어도, 너와 내가 얼굴 맞대는 시간은 길었겠지. 내 존재 가치를 구원자라는 이름이 아니라 너의 유타라는 것에서 찾았을지도 모르고.
... ...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 꼭, 나여야 해? (목소리에 물기 스몄다.) 난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여기서 널 향한 죄책감을 더 키우고 싶지도 않고. 이걸 원하는 건가?
네가 좋을대로 해. 그게 편하다면.
문을 열기 위해서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쾅쾅쾅쾅!!
누군가가 문을 부술 듯 두드립니다.
폭스트롯이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숨을 겨우 고르고 있는 은수아 입니다.
은수아: 너희 신문 봤어? 뉴스에도 나오고 있는데… 제2구역에서 엄청 큰 지진이 났대. 베니랑 유진도 그렇고 제니퍼랑 페릴네스는 이미 현장에 파견됐어. 너희도 준비해야 할거야. 빨리 준비 해! 다시 말하지만 파트너 필요한 일이야. 가서 돕든 돕지 않든 그건 알아서 해.
그 말을 끝으로 은수아는 다른 이의 부름을 듣고 그쪽으로 달려갑니다.
폭스트롯:이번에도 자리만 지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제이슨:(어차피 여차하면 또 끼어들겠지만. 무언가 말하려다 고개만 대강 끄덕여 보인다.)
메시지가 도착합니다.
호출입니다.
세계에 재난이 내리면 사람들은 구원자를 찾습니다.
폭스트롯과 제이슨의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이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껏 내린 커피도 마시지 못하게 됐지만…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이동하도록 합시다.
제복을 갈아입고, 필요한 것을 챙기고, 출동할 때입니다.
제이슨:(쯧. 속으로 작게 입맛이나 다시며 잔을 내려 놓는다.)
가자. '구원자' 가 또 필요하시다니까.
제2구역의 상공에서 타이머와 카운터를 실은 헬기가 착륙합니다.
총성 같은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 착륙장을 찾지 못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기체, 공격적으로 물길을 쏟아붓던 소방차들과 허탈하게 대피소에 늘어진 난민들.
머리가 어지럽고, 귓속이 먹먹합니다.
제1~2시 타이머와 카운터의 합류로 간신히 불길이 잡히기 시작했다지만 아직 잔재하는 불씨 탓입니다.
무너진 공장의 잔해, 그을린 땅, 잿더미가 되어가는 숲과 혼비백산 도망치는 사람들…….
아이의 울음소리와 날 선 비명, 동물의 울부짖음이 창 너머로 열기와 함께 스며듭니다.
광대뼈 주위가 홧홧하게 달아오릅니다.
좋건 싫건, 익숙해진, 익숙해져야 할 광경이었습니다.
제이슨:
관찰력
기준치:85 42 17
굴림:65
보통 성공
공장의 높은 기둥은 여전히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있습니다.
그 근처로 땅이 길게 갈라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지진으로 인해 생긴 싱크홀입니다.
주위의 광경은 온통 엉망진창이지만, 신의 파편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만은 옅은 그을음을 얻었을 뿐 완벽하다시피 안전했습니다.
헬기에서 내리면 리슬러 부관이 맞이합니다.
리슬러: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긴급 호출 끝에, 제2구역에 타이머와 카운터를 실은 헬기가 내용물들을 쏟아붓고, 정신없이 잿더미 사이를 지나왔습니다.
공기가 매캐한 탓에 도착할 때까지 제대로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걸었다고, 드러난 피부며 옷자락은 재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착한 곳은 제2구역의 변두리에, 그나마 멀쩡하다 싶은 숙소입니다.
하인리히: 잠깐 앉아보게.
로비에 앉은 하인리히 장교가 보입니다.
제이슨:(덤덤하게 서서 대꾸했다.) 말씀하시죠.
폭스트롯:(한숨 작게 쉬고는 저도 서서 고개 까닥.) 경청하겠습니다.
불씨가 남았지만, 날이 지나치게 어둡습니다.
바람이 잠잠한 탓에 그나마 더 번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어쩌면 제7시의 타이머와 카운터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너무 늦은 시간이라 더는 누군가를 구할 수도, 찾을 수도 어렵습니다.
간신히 복귀 명령이 떨어진 마당에 불편한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인리히: …….
호출한 장본인은, 정작 말이 없습니다.
시선은 로비의 유리창으로 향합니다.
투명한 것은 여과 없이 바깥의 광경을 담고 있습니다.
참혹한 광경은 가히 종말이라 부름이 옳습니다.
하늘이 녹아내리고 체질이 불에 풀어지니 발을 디딘 땅마저 말랑말랑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녹고 녹아, 바닥으로 꺼질 것 같았습니다.
도밍게즈조차 이런 꼴인데, 지구, 나의 세계는 지금쯤 어떤 꼴일까…….
애먼 생각이 스쳐도, 하인리히 장교는 여전히 같은 곳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티가 역력합니다.
그가 선인이건, 악인이건, 도밍게즈를 향한 애정과 헌신만큼은 진실이었으므로.
단 하나를 위하여 다른 존재들은 스러져도 좋다는 마음.
오로지 단 하나를 위한 애정과 헌신.
토악질이 나오지만, 그 이유는 제이슨이 단 하나의 무언가를 위해 희생 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겁니다.
매캐한 연기 냄새 때문에 목 안이 까끌까끌 합니다.
한참 침묵하던 그는 곧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습니다.
하인리히: ……고생했네. 오랜만에 한 자리에서 보는 것 같은데, 상황이 영 좋지 않군.
목소리가 유난히 케케묵은 라디오의 탁음처럼 들렸다면 착각은 아니었겠죠.
애석한 인사말 후로, 그가 당부를 덧붙입니다.
하인리히: 지진으로 인해 불규칙하게 바 닥이 꺼지고, 싱크홀이 생기고 있다니 주의하게. 되도록 탐사대가 확인한 위 치만 이동하고, 돌발행동은 절대 지양해야 해. 사태가 심상치 않군.
전달 사항은 걱정 있었던 걸까요?
악어의 눈물이 따로 없습니다.
하인리히: 내일 아침에 보지. 푹 쉬도록.
무거운 발걸음이 바닥을 밟자 군화 특유의 소리가 로비를 울립니다.
왜, 어째서.
멸망을 저지할 세계의 구원자가 이곳에 임하였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 난 걸까.
모두의 얼굴 위에 드리운 불그스름한 음영이 괜스레 불길했습니다.
예언 속 한 장면 같은 멸망을 무력하게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카운터가 도밍게즈에 온 지 정확히, 7년째 되던 날입니다.
초봄의 건조한 바람을 타고 불씨가 타닥타닥, 돌아갈 곳을 찾아 흩날렸습니다.
도밍게즈에 이토록 큰 재앙이 임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에요.
타종의 삶과 세계를 갈아넣어 갈취한 평화마저 온전하지는 못하단 걸까요?
아니, 어쩌면 ■■은 아무도 모를 때, 홀연히 임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폭스트롯:... 다들 피곤하겠다. 올라가자. 잠깐이라도 쉬어야지.
제이슨:... 먼저 가. 조금 있다가 따라갈 테니까.
베니: (제 얼굴의 검댕을 대충 문질러 닦다가 짜증스런 투 냈다.) 쟤네 또 나갈걸? 이 야밤에 어딜 가겠다고.
아르갈리아: ... 할 일을 할 뿐이에요. 아무튼, 잠깐 뒤에 다시 모여서 다녀오죠. 그러니까... 지구... (하.) 쉬세요. 피곤하시겠어요.
제이슨:누구 말대로 제 역할에 심취한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어느 정도 말 듣겠지. (바깥으로 시선을 둔 채 대꾸했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폭스트롯은 곧이어 포기한 듯 몸을 돌려 타이머들과 함께 방으로 올라갑니다.
남은 것은 카운터... 그러니까 지구의 타이머들 뿐이에요.
첼시: 당신들, 오기 전에 또 싸우기라도 했습니까?
제이슨:(깜빡) ...뭐, 우리 말하는 거야? 또라니.
첼시: 그럼 누가 더 있어요? 수아랑 하제는 거의 없는 사람 취급이나 하는데 그쪽들은 그것도 아니고.
은하제: (흥.) 이번에는 폭스 형 안 울었네요? 캬~ 장하다. 매번 혼자 울고 있던데.
제이슨:앞에서 죽을 것처럼 구는 데 어떻게 그런 취급을 해. (하제를 보고는 살짝 말문이 막혔다가) ...거기까진 몰랐네.
결국 꺾을 생각도 없으면 죄책감이라도 가지지 말지... 그냥 이 기회에 거기 눌려 살아보라고 얘기했더니 그렇게 됐어. (뜻은 대강 비슷하니 얼버무려 뱉는다.) 늘 똑같아.
베니:This message has been hidden.
제이슨:(뚱...) 너흰 사이 좋아서 좋겠다?
베니: 너도 너지만 걔도 걔다. 멍청이들. 사이 좋은게 아니라 타협한 거야. 애초에 돌아가면 더 못 볼 얼굴이잖아. 막무가내로 잘 지내라는 소리가 아니라 싸울 것 같으면 차라리 떨어져 있고 그게 싫으면 의견 좀 맞추라는 소리야. 볼 때마다 얼굴 우중충해서!
무슈: 노, 노력 하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왈가왈부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힘드니까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어쩔 수 없잖아요...? 너무 속상해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즈음은 알지만...
제이슨:왜. 우리도 나름 타협하고 있는데. 난 그 애 얼굴을 보고 있는 쪽이 더 정신 드는데. 적어도 내가 뭐 때문에 여기 오게 됐는지 계속 상기할 수 있잖아. (정말로 그랬나? 해가 지날 수록 정말 말 그대로 옆이 비는 것을 못 견디는 것에 가까워진 느낌이지만. 말을 아끼며 어깨나 으쓱해보였다.) ...나도 알아. 성격 나쁜 짓인 거.
너희 파트너나 신경 써. 타협했다곤 해도 그쪽들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닐 거 아냐.
베니: 야. 하나만 묻자. 그게 우리, 가 타협한 거냐... 아니면 너 혼자 타협한 거냐? 그냥 걔 죄책감 더해서 네 옆에 잡아두고 싶은 거 아니고? (빤히 보고 있다가 한숨 푹 쉬었다.) 그 놈은 이미 받아들이고 밤마다 심심하면 어쩌냐고 찡얼거리는 거 받아주느라 짜증나는 거 외에는 괜찮거든.
은하제: 왜 그쪽을 신경 써야 해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그만이죠. 맞춰 준다잖아요. 베니 누나의 방법도 있고 제이슨 형의 방법도 있는 거죠. 결국은 스트레스만 덜 받으면 그만이고요.
제이슨:...난 이미 폭스트롯이 뭘 하든 고집을 부리든 내버려두고 있잖아. 내가 정말 죄책감 따위로 붙잡아두려고 했다 해도,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나만 못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상대 쪽도 마찬가지라고. (말을 옮기면서도 허탈한지 다소 기운빠지는 얼굴.) ...좋았던 시절까지 내가 마지못해 어울려준 게 아니냐고 물을 만큼.
베니: 왜 아직도 살려뒀냐?
첼시: 베니. 속마음 나왔습니다.
제이슨:...차라리 나한테 그 때 기억이 있었다면 드잡이질이라도 했겠지. 뭐...
거기까진 나도 크게 따져물을 처지가 안되니까 길게 말 못한 거야. 그러니까, 다른 쪽으로라도 내 마음대로 굴어보려고.
...그 전에 밤에나 똑바로 들어오면 좋겠는데.
은하제: 헤...~. 어느 쪽이든 잘 모르겠네요. 제가 봐온 형이라면 안 그럴 것 같은데. (뭐...) 그것도 폭스 형이 감당할 일이니 전 아무래도 좋죠.
그보다... 형. 외로움 타요?! 저희가 같이 자줄까요?!
베니: 왜 슬그머니 날 껴? 난 빼!
제이슨:... ...그것도 이유가 있긴 하지. (괜히 빼는 베니를 보고) ...그럼 오늘이라도 같이 누울까.
오늘 방으로 돌아가면 왠지 네 말대로 더 싫은 기분 들 것 같은데... 왜 살려뒀나 싶고... (거짓말이다.)
은하제: (아. 저거 거짓말이다. 슬쩍 숙여서 베니 귀에 속닥....) 저거 진담인 것 같은데 어쩔 거예요?
베니: 어...? 어?! 지, 진짜야?! (팔랑귀.) 젠장... 어쩔 수 없지... 오늘만 같이 자주는 거야! 다 큰 남정네들이랑 같이 파자마 파티 할 나이는 지났다고! 게다가... 여기 있는 놈들 왜 나랑 한 놈 빼고 다 남자야? 성비 문제 심각하다고 생각 안 하냐?!
오늘은 다같이 자는 날로 하죠.
그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다면요.
제이슨:그거야말로 신한테 따져야 할 문제 같은 걸... (굳이 딴지 걸지만 어쨌든 표정이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우르르 한 방으로 몰려서 들어갑니다.
물론... 룸메이트를 기다리고 있던 유진은 베니의 말 한 마디에 입이나 삐죽이며 순순히 밖으로 나갑니다.
침대는 딱딱하고 탁자와 의자는 다리의 아귀가 맞지 않아 조금 흔들립니다.
창 밖엔 볼 것이라곤 하나 없어요.
협탁에는 필요한 용품들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습니다.
침대에 눕거나, 탁자에 앉거나, 씻으러 들어가거나.
아무튼... 편히 시간을 보냅시다!
제이슨:...나 피곤하니 먼저 씻는다. (냉큼 수건을 집어들고 욕실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베니: 웅. 그러등가.
은하제: 물 받아서 머리까지 잠수해봐요. 얼굴까지 익을 수 있어요.
첼시: ... 굳이?
제이슨:...신종 처리수법인가?
은하제: 그치만 제이슨 형은 하야니까 빨개진 것도 보고 싶어서... 라고 하면 혼나요?
제이슨:... ...대체 뭘 보고 싶은 거야? 아무튼 알았다...
헛소리를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갑니다.
제이슨... 휴대폰 가지고 들어갔나요?
제이슨:(있다. 화장실 선반에 대충 올려놓은 휴대폰이.)
음. 그렇다면 휴대폰이 울립니다.
메시지가 도착했단 뜻입니다.
제이슨:? (올려놓자마자 다시 슬쩍 집어 메시지를 확인한다...)
휴대폰을 확인하면 아니나 다를까!
DOT입니다.
정확히는 DOT의 동관에서 도착한 메시지입니다.
17살, DOT에서 처음 폭스트롯과 만난 이후 꾸준히 해오던 바로 그 ‘연구 보고’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예외는 없는 모양이죠.
DOT는 여전히 타이머와 카운터가 긴밀해지기를 바라고, 그로 인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이슨:(설마 이 시간에 또 부르나... 이미 씻으려고 벗어놨는데.)
밖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나며 큰 소리가 납니다.
제이슨:(그 이상한 긴밀함... 이라는 감각만 아니었다면...) ...?
(대충 수건을 두르고 고개를 내민다.) 무슨 일이야?
욕실 바로 밖에서 첼시와 베니가 엉켜서 넘어져 있습니다.
베니: 오. 나왔다. 너 방금 봤냐? DOT에서 문자 온 거?
제이슨:이거? (손에 쥔 휴대폰 들어보이며) ...봤지. 그런데 왜?
첼시: 이거 하나 알려주겠다고 방금 욕실 문을 열려고 했단 말입니다, 이 미친 여자가!
베니: 아니. 알려줘야 하는 거잖아? 애가 휴대폰 안 들고 갔으면 어쩌려고?
제이슨:아니 뭐... 그럴... 수도... (사실 그럴 수 없긴 한데.)
...어쨌든 대충 봤어. 그래서 이번 연구 보고가 뭔데? 당장 소집이라던가?
(이미 내용 보고 있으면서 묻기나 한다...)
첼시: 그... 체엑을 비롯해 상호 신체 일부를 섭취하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확인할 것... 입니다.
베니: 각인에 접촉이 이루어지면 신체적이랑 정신적 변화도 확인하랬지? 아마.
제이슨:미친 건가... (중얼거리며 문을 도로 탁 닫는다.)
미친 것이 틀림 없습니다.
평소라면 연구원들이 득달같이 쫓아올 테지만, 지금은 제2구역이잖아요?
무시해도 좋을 거예요.
제이슨:애초에 내가 아니라 그쪽이 받아들이겠냐고... (중얼거리다 한숨과 함께 찬물을 머리 위로 쫙 틀어 끼얹는다.)
찬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며 몸을 식힙니다.
생각 정리라도 되나요?
제이슨:... ... (춥다.)
(뜨뜻한 물로 끽 돌려 물이나 받는다.)
귀엽다.
뜨뜻한 물이 받아지며 찰랑입니다.
제이슨:(그런데 이런 건... 폭스같은 사람들이 들어가야 더 빨개지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나 하며 물 속에 앉아 고개를 푹 담근다...)
DOT의 숙소에서 나는 포근한 향이 아닌, 싸구려 디퓨저 향이 퍼져 있는 습윤한 향이 공중을 감돕니다.
보글보글...
딸기 되겠다 딸기
제이슨:(뜨겁다...)
(고새를 못 견디고 익은 토마토 얼굴로 고개를 뺀다.) ... ... 이런 게 왜 궁금한 거야?
토마토다 토마도...귀엽다 귀여워.......
제이슨:(어이없음)
(빠르게 미지근한 물로 뽀득뽀득 씻고 물기를 털어낸다. 이 향이 아니야...)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향을 찾다보면 밖에서 애들끼리 모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이슨:... (얼굴 물기를 닦다 말고 소리에 귀나 기울인다.)
"쟤들 또 어디 가?"
"아까 전에 화제 구역 가는 거 아닙니까?"
"휴식이라는 단어를 모른대? 지금이라도 가봐야 하나..."
"됐어요. 원래 저 사람들끼리 했어야 하는 일이고 나서서 하겠다잖아요. 왜 말려요? 원하지도 않을 텐데."
제이슨:(결국 그놈의 의무감 맞으면서... 속으로 염불을 외며 옷을 대충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
전부 다 나간 건가? 남은 사람 없이?
첼시: 어... 글쎄요? 일단 다들 나가긴 했습니다. 가기 싫어도 가야겠죠.
제이슨:...그래? (제 뺨을 손으로 두어 번 문지르며 생각하다가) ... ...잠깐 나갔다 올게.
베니: 방금 씻은 놈이 어디 가려고?
제이슨:글쎄... 감시?
손 거들 생각으로 가는 거 아니니까. (휴대폰이나 주머니에 찔러 넣고 겉옷을 걸친다.)
재 날리면 다시 씻지 뭐.
첼시: 몰래 가려는 겁니까? 그렇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제이슨:그럼 나야 고맙고. ...되도록 못 알아보게끔 부탁해.
첼시: 그 전에 주의점 몇 가지. 전 멜처럼 사람 자체에 확각을 씌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멜한테 들키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한 눈에 알아볼 겁니다. 셋째, 3시간 이상 걸리면 찾으러 가겠습니다.
제이슨:그러지. ...들켜도 알아서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지만... 역시 어려운가.
몇 시간씩 걸릴 일은 없을 거야.
첼시: ...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첼시는 제이슨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튕깁니다.
익숙한 모습이 아닌, 완전히 다른 모습.
이 정도면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제이슨:(빠른 걸음으로 문제의 화재 구역으로 향했다.) ...
화재 구역에서는 나름 불길이 잡혔는지 검은 연기만 자욱합니다.
그 속에서 난민을 구하고 있는 타이머들이 눈에 띄는군요.
제이슨:
관찰력
기준치:85 42 17
굴림:19
어려운 성공
저 멀리서 흐릿하게 폭스트롯이 보입니다.
아이 둘을 품에 안고 무너진 건물 잔해 위를 걸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일전에 보던 우울함에 가까운 얼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이들을 안심 시키는 쾌활한 미소입니다.
제이슨:... (필요한 사람들 앞에서만 내보이겠다는 건지. 혹은 내 앞에서 그럴 수 없겠다 여기는 건지 몰라도...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다.)
(굳이 지금 시간에 이렇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구할 인간들은 구하러 나다닐텐데.) ...여기가 지구였으면 똑같이 저런 꼴로 못 돌아다닐 거였으면서.
... ... (주위에 멜은 없겠지? 대충 둘러보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잔해를 파해쳐 밑에 깔린 이들을 꺼내고, 다친 이들을 치료하고, 공포에 질린 이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이 하는 일은 사람을 구하는 일, 단지 그것 뿐입니다.
맞아요.
그들은 구원자가 되어야 했으니.
개개인의 선택은 달랐어도 그들의 존재 가치는 구원자라는 이름 아래에서 나오는 타인의 사랑의 크기였으니까.
이토록 생동감 넘치고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짓는 폭스트롯을 본 적이 있나요?
적어도 지금의 제이슨은 없을 겁니다.
제이슨:
행운
기준치:55 27 11
굴림:97
실패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폭스트롯과 눈이 마주친 기분입니다.
제이슨:...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리며 멀어진다.)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가 곧 사그라듭니다.
별 일 없었을 겁니다.
아직 환각은 풀리지 않았고... 제이슨은 들키지 않았으니까요.
제이슨:(다시 들여다 보면.. 보이나? 신경 쓰이는데...)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요.
"어어어... 유, 윳티! 저쪽에 사람이 있었어! 저기 저기! 멜쨩 힘만으로는 못 하니까 빨리 저기 가서 구해줘!"
"... 그렇지만 저쪽에도 사람이 있는데?"
"멜쨩이 갈 테니까 암튼 가!"
폭스트롯은 당신을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죠? 아마도.
제이슨:(설마 나...? 는 아니겠지? 빤히...)
황당하다는 눈으로 당신 힐끔 보았다가 멀어지는 폭스트롯과...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르켰다가 당신을 가르키는 멜이 보입니다.
제이슨:...\
(조용히 무시한 채 폭스트롯의 뒤를 밟는다.)
폭스트롯은 이전과 다름 없이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쾌활하게 대화하고 있습니다.
함께 있는 모두가 안도의 웃음을 내비추고, 희망을 품습니다.
그것이 그의 역할이라서인지 본성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폭스트롯:그러고 보니... (잠시 주위 둘러 봤다가 눈 마주치자 슬금 일어나서 당신 쪽으로 간다.) 거기서 뭐하십니까? 이쪽으로 와요.
제이슨:... ...예? 저는 왜...
폭스트롯:거기서 혼자 있으면 위험하잖습니까. 다같이 있는 편이 좋습니다. 홀로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이 보이며 웃음 내걸었다.) 다같이 피난민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
제이슨:(미약하게 얼굴을 움찔거리다 고개를 젓는다. 그런 걱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도밍게즈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이들인데.) ...괜찮습니다. 스스로 몸 건사할 정도는 되어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이런 시간에도.
폭스트롯:평소 같았으면 넘어갔을텐데... 지금은 위급 상황입니다. 손 대지는 않을 테니 다친 곳이 있다면 타이머에게 치료 받으시고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합시다. (흠... 사람들 머리 수 세다가 하하.)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것도 못 하겠습니까.
제이슨:그런가요. ...카운터 분들은 함께 나오지 않나요?
폭스트롯:(자신을 빤히 보는 아이 하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꼭 안고 뺨 부벼오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소리나 내며 있다가 멈칫.) 맡은 일이 다를 뿐입니다. DOT에서 하는 일은 많으니까요.
제이슨:(입을 꾹 다물고 서서 하는 양을 바라보다 고개만 주억거린다. 그러니까, 그가 구원자로서 응당 원하는 말이 무엇이 있더라.)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 이제 돌아가봐야 할 것 같네요. 정말 괜찮으니 굳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대의 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빠르게 떠났다.)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답하지 않습니다.
숨 답답하게 만드는 연기 속으로 한 발 씩 내딛고 있으니 목이 까끌거립니다.
원하는 답은 얻었나요? 돌아갈까요?
제이슨:(지금 구원이 필요한 건... 남의 평화를 훔쳐 연명한 저들이 아니라 나인데. 왜 항상 원하는 답도 얻지 못하고 배회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사실 반쯤은 제가 자초해놓고도.)
... (답답한 숨을 뱉으며 서서히 느려지는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서는... 카운터들이 자지 않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몇은 졸고 있고... 몇은 트럼프 카드로 게임을 하고 있어요.
여기가 카운터 집합소인지 도박장인지...
제이슨:(황당) 잘들 논다...
(대충 옷먼지를 털어놓고 들어와 털썩 앉는다.) 그새 심심해서 내기도박이야?
베니: (당신 뺨에 묻은 검댕을 손으로 문질러 닦고는) 어쩔 수 없잖아. 다 같이 모여도 얌전히 걸-즈 토크나 할까?
은하제: 걸-즈가 아니라서 무리예요. 형도 낄래요?
첼시: 그래서 어땠습니까? 후기라도 들려줄 생각 있으신지.
제이슨:...별 거 없었어. 그냥... 거기선 잘도 웃고 다니더라고. 내가 누군 줄도 모르고 같이 가자고 하길래, 떼어놓고 온 참.
(흠.) 멜하고 눈이 마주친 것 같긴 한데.
첼시: 예? 그 양반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
은하제: 그걸 또 봤네... 역시 첼시 형이 아니라 제가 같이 갔어야 했다고요.
베니: 네가 같이 가서 뭐하는데? 네 짝궁 보고 혈압 터져서 가위 던지기?
은하제: 베니 누나는 왜 계속 제 뼈를 긁어요?
제이슨:아무 말 안하던데. 오히려 날 보고 폭스를 떼어 놓으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베니: (카드 유심히 보고나 있다가) 여우가 봤으면 난리 났을 것 같았겠지. 안 그래도 신경 엄청 쓰는 것 같더라.
제이슨:차라리 맨 얼굴로 갔다올 걸 그랬지. (길게 늘어져선 중얼거렸다.) ...그놈의 구원자 노릇, 괜히 보고 왔어.
은하제: 그걸 보고 싶어서 간 거 아니었어요? 폭스 형 예전에도 그런 사람이었다잖아요. (카드 두 개 툭 내려 놓는다. 흠흠...) 사람들 앞에서 입씨름이라도 하면 큰일 났을걸요~.
제이슨:그러려고 간 거긴 한데... 막상 눈 앞에서 좋다고 자기 사람들 앞에서만 웃는 거 보니까, 좀. (툭 뱉으며 여럿의 카드를 뒤에서 훔쳐본다.)
승기는 아무래도 한쪽에 몰려 있습니다.
은하제... 이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람... 소리가 나올 정도로 좋은데요?
아까 전부터 포커페이스 하나는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첼시: 그럼 이건 별 것 아닌 질문입니다만... 당신도 폭스트롯의 웃음을 보고 싶은 겁니까? 당신에게 웃어주는 걸요?
제이슨:(천성이 꾼인가...?) ...글쎄. 잘 모르겠는데. 지금은 웃는다고 해서 별로 기분 좋을 것 같지도 않네. 못 웃는 이유야 내가 더 잘 알고.
가능성 없는 걸 기대해서 뭐하게? 연기도 못 할텐데. ...그냥 싫어. 난 그럴 대상도 다 강제로 뺏겨서 왔는데 그쪽은 제 사람들 중하다고 앞에서 웃고 다니는 게.
베니: 그럼... 너는... 하씨, 미친건가? 왜 이 모양... 하...(카드를 냅다 하제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여우가 너랑 똑같은 처지가 됐으면 좋겠냐? 모두 강제로 빼앗기고 중요한 사람 하나 남지 않은 곳에서 고립되는 것을 원해?
제이슨:뭐...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느끼는 바가 조금 달라지려나. (조금 우울해진 얼굴로 흩뿌려진 카드를 주웠다. 얘하곤 도박하지 말아야지...)
은하제: (으붋...) 그럼 지구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하면 손이라도 잡고 같이 가던가요. 거기서는 사랑하는 사람 하나 없이 남아서 폭스 형도 제이슨 형 같은 느낌 느낄 수 있겠죠. 서로 이해하기엔 그것보다 좋은 것 없다고 보는데요.
제이슨:내가 같은 입장이었어도 오히려 더했으면 더했겠지만. 그래서 이해는 하는데... 내가 당한 입장이라는 게 문제지. 적어도 그놈의 역할 놀이에 심취한 것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화나진 않았을걸.
날 돌려보내려는 것도 뭐... 나에 대한 죄책감에 더해서 날 자신과 같은, 어떤 세계의 구원자로만 보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하제의 카드 한 장을 쏙 빼간다.) 그런 말 한다고 순순히 따라올 것 같아? 오히려 화를 냈으면 냈지.
첼시: 솔직히 말해서... 폭스트롯은 그게 그냥 성격이라고 봅니다. 구태여 DOT의 타이머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구하러 뛰어 나갈 사람이었을걸요. 물론 전 이야기를 많이 해본 적은 없지만. 타이머의 능력이 없었으면 군인이 되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애초에... (자기 카드 훑다가 하...) 천성이랑 역할에 심취한 것은 구분하기 힘들지만...
은하제: (엇... 눈 뜨고 뺏겼다....) 그럼 이렇게 생각을 해보는 건요? 우리들이 이 세계에 있기 때문에 지구가 멸망한... 음, 솔직히 완전히 멸망했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우리가 돌아간다면 지구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정이 세워진다면... 우리를 돌려보내는 것이 맞지 않아요? 지구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요.
제이슨:...그렇겠지. 똑같은 가치를 강요받아서 온 입장에서는 마찬가지로 기분만 나빴지만. 애초에 우릴 돌려보낼 생각인건 알아, 저쪽 모두. 하지만 전부 불확실하잖아.
난 세계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나한테 필요한 사람들이 없으면 돌아가도 아무 소용도 없고... ...그냥, 그들이 훔친 평화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 싫어.
무슈: (조용히 판이나 구경하고 있다가) ... ... 돌아갈 방법이 있다고 가정을 하면요...? 그러니까... 우리 긍정적으로 새, 생각을 해봐요. 우리의 소중한 이들이 모두 살아있고... 지구도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면... 어때요? 여기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어요?
제이슨:(짧지 않게 침묵하다가) ...그럼 떠나야겠지. ...왜? 미련이 남아?
베니: ... ... 슌. (귀 잡고 소근소근...) ... 넌 아직 연애 도중이지만 쟨 아니거든...? 조용히 해...
무슈: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저, 저희 나름 오래... 봤는... 봤는데요...? 정이라도 남을까 싶어서...
제이슨:...그럼 데리고 가던가... ...예전엔 내가 어땠을 지 모르겠지만... 아마 너 같은 입장이었으면 난 남았을 확률이 더 높았을지도.
그런데 뭐... 글쎄. 이젠 날 봐도 그쪽이 정이 안 남았을걸. (가라앉은 눈.) ...얼굴 마주하는 것도 피하는데.
은하제: (옆에 있던 마카롱이나 들어서 제이슨 볼에 꾹. 물론 자신도 씹고 있고.) 뭐, 그건 알아서들 선택하시고요. ... ... 폭스 형이 좀 불쌍하니 말 안 할래요. 이거나 먹어요.
제이슨:그 전에 우리를 좀 더 불쌍히 여겨봐라. 똑같이 1년 통째로 날아간 처지에. (어이없다는 얼굴로 마카롱을 잡아 쳐다만 본다.)
은하제: 맞는 말이긴 하죠. 우리는 우리 처지나 생각합시다. 노비가 주인댁 걱정해서 뭐한담.
첼시: 비유 하고는...
베니: 됐어. 잠이나 자, 이것들아! 내일 복구 작업이든 뭐든 하는 거 따라가야 할 거 아냐!
제이슨:...그래. 도박 그만하고 자라. 버릇 나빠진다.
(마카롱을 입에 대강 쑤셔넣고 터덜 욕실로 들어간다...)
은하제: (욕실 문 빼꼼.....)
제이슨:? 뭐야.
은하제: 잘생긴 남자의 욕실 훔쳐보기.
제이슨:... (말 없이 눈 앞에 대고 탁 닫아버린다.)
은하제: (코 박고 괴로운 소리 내며 굴러가다)
습기가 아직 덜 빠진 욕실에 들어오니 드디어 조용해졌습니다.
제이슨:(옷 벗고 나가기 전 마냥 똑같이 물뿌려 재를 씻어냈다. 귀찮은 짓이긴 했네...)
...
보나마나 내일도 그 꼴로 나오겠지... (중얼거리기나 하다가 훨씬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왔다.)
분명 욕실에 들어간지 얼마 안됐는데...
이미 다같이 도로롱... 침대 위에 엮여서 자고 있습니다.
제이슨:(검댕은 다 지웠으니 됐지.)

제이슨:(이쪽도 잠드는 속도가 무슨...)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고민을 가진 사람처럼 못 자는 사람은 제이슨 뿐이지 않을까요...
제이슨:... (안 깨게 침대 옆 바닥에 대충 담요깔고 주섬주섬 누웠다...)
제이슨:
SAN Roll
기준치:50 25 10
굴림:67
실패
(...)
수마에 들기 바로 전, 흐릿한 소리가 들립니다.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You make me happy,
When skies are gray...
........
새벽까지, 다행히도 추가적인 호출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이 밝기를 기다린 것처럼, 알람보다 일찍 제이슨을 깨우는……
띵.
익숙한 효과음 덕분에 일찍 깨고 맙니다.
문자 메시지의 알람입니다.
화면에 깜빡이는 아이콘이 눈에 익습니다.
네, 또! DOT에서 발송된 지시사항입니다.
하기사, 카운터에게 동시에 쏟아질 메시지라면 그것뿐이긴 하죠.
아직 채 벗어나지 못한 잠기운과 함께 슬라이드를 밀어서 잠금을 해제합니다.
텍스트가 들어찬 화면이 보입니다.
내용은 언젠가처럼 간결하기 짝이 없습니다.
본론이 전부입니다.
텍스트 마지막에 도착한 커서가 현란하게 깜빡입니다.
제2구역의 화재를 일단락 지으니 문제로 불거진 것이 싱크홀인 모양입니다.
땅이 갈라지거나, 이유 없이 꺼지거나, 멀쩡히 서 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길게 금이 간 지반은 불안정합니다.
사람들은 되도록 밖에 나오지 않았고, 타이머와 카운터를 비롯한 구조 대원들도 근처를 지날 때는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벌어진 틈새가 깊고 어두워서 무엇이 들었을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습니다.
대피소의 아이들은 괴물이 산다며 수군거리곤 했습니다.
그냥 둘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닙니다.
아스팔트가 갈라진 정도가 아니라 땅이 뒤틀린 상황이었으니까.
인간의 한계론 처리하기가 곤란했겠죠.
타이머와 카운터 ‘전원’의 참여가 필요할 정도의 일인가 싶었지만, 어차피 판단은 개인의 몫이 아닙니다.
7년간 깨달은 사실이에요.
다른 카운터들은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주섬주섬 제복을 챙겨 입고 있습니다.
제이슨:(텍스트를 확인하자마자 환복을 마치고 방을 나섰다.) ...해 뜨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부려먹는군.
은하제: 약간... 좀비 될 것 같은데 기대서 가도 되나요...
제이슨:...그러든가. 어제 바로 안 잤어?
은하제: 제 평균 수면양은 10시간이에요. (당당..... 하게 한쪽 팔 끌어안고 기대서 가기....)
제이슨:넌 좀 이 시간에 익숙해져도 되겠다... (정작 거의 못 잤지만 태연하게 기댄 사람까지 끌고 현장으로 나갔다.)
밤 새 밖에 있다가 호텔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타이머들과 합류합시다.
모두 하나같이 피곤하고 그을음으로 더러워진 모습이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7년간 그들은 카운터들에게 기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카운터들이 돌아가더라도 멸망이 다가온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힘으로 서기 위하여.
쏟아지는 무거운 기대에 부응할 수 있기 위하여.
… 본래 그랬어야 했으니까.
낡고 낯선 숙소를 벗어나면 거북이 등껍질처럼 다닥다닥 갈라진 흙바닥이 펼쳐집니다.
물론 아스팔트 도로의 사정이라고 딱히 다르진 않았습니다.
노랗고 흰 금들은 모양이 어긋나 잘못된 짝을 찾고, 손을 잡은 채 춤을 춥니다.
갈라진 바닥 아래로 드문드문 나무뿌리가 목이 졸린 채 매달려 있습니다.
아침에 보니 더욱 적나라합니다.
기괴하게 비틀린 풍경은 종말의 한 조각을 담고 있습니다.
정말 세계가 멸망한다면, 이 정도론 끝나지 않겠지.
시간이 멈춘 그 날, 편의상 그것을 멸망이라고 불렀지만…… 실제 멸망이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제이슨:
지능
기준치:80 40 16
굴림:89
실패
악몽을 곱씹습니다.
건물은 무너지고, 사람들의 피가 도로를 적시며 듣도 보도 못한 괴물들이 산 것들을 모두 잡아먹고 찢어 죽이던 꿈을.
울음이 끊이지 않던 악몽을.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없이 멎는 것은 멸망이라 부르기엔 너무 온건하고, 불타고 땅이 무너지는 것 또한 종말이라 부르기엔 유순합니다.
제2구역은 3할 가까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탓에 어느 싱크홀을 말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감이 옵니다.
가장 높은 공장의 굴뚝이 있는 곳. 장인이 세웠다기엔 주인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그곳.
공장은 터만 남고 이 제 와선 굴뚝만 외로이 자리를 지키는 곳일 거예요.
왜냐하면……
압도적인 깊이와 넓이 때문에 그 아래 싱크홀을 무저갱이라고 불렀으니까요.
메꾼다면 제일 먼저 그곳이겠죠.
느슨하게 바닥을 딛는 발걸음은 신중하지만 망설이지 않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관으로 뛰어갈 때처럼 스물여 덟의 발소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요란을 떨어댑니다.
싱크홀 앞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침묵입니다.
하인리히 장교도, 리슬러 부관도, DOT의 연구원이나 직원, 혹은 제2구역 자체 군인까지도.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용케 무너지지 않은 굴뚝 아 래 스물여덟이 전부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이슨:
관찰력
기준치:85 42 17
굴림:11
극단적 성공
우리가 이곳에 오기까지, 누군가를 마주쳤던가?
오는 길목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하나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고 시야를 되감아 봐도 그렇습니다.
세계가 사랑하는 타이머와 카운터.
이 한 줄의 정의란 재해 구역에서도 어긋나는 법이 없습니다.
임무를 나가는 길이건, 목숨이 사활에 걸린 상황이건, 타인의 시선은 늘 타이머와 카운터를 따라다녔습니다.
하인리히 장교는 특히 타이머와 카운터를 귀애했습니다.
임무가 있을 때면 꼭 직접 찾아와선 지시하고, 독려했었죠.
…….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첫날…… 하인리히 장교가 뭐라고 당부했었지?
하인리히: 지진으로 인해 불규칙하게 바닥이 꺼지고, 싱크홀이 생기고 있다니 주의하게. 되도록 탐사대가 확인한 위치만 이동하고, 돌발행동은 절대 지양해야 해. 사태가 심상치 않군.
머릿속을 헤집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를 되짚습니다.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무도 없이, 우리만 이런 곳에 둘 턱이 없습니다.
그는 타이머와 카운터의 가치, 생명의 무게를 정확히 아는 이였으니까.
이토록 조용했던, 외따로 되었던 적은……
문득 어느 날의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을 때,
발아래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싱크홀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입을 벌렸고,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크게 벌린 아가리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바람이 마치 등을 떠미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추락합니다.
구해주긴커녕 소화를 돕는 꼴이었습니다.
흙이 무너지는 소리, 돌이 떨어지는 궤적, 피부를 할퀴는 나무뿌리……
온갖 요란한 감각이 시야와 생각을 교란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버린 것처럼 떨어지는 부유감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책장이 떠다니지도, 버섯이 날아다니지도 않았지만, 꼭 시간만은 멈춘 듯합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서······
익숙한 패턴이 제이슨을 스쳐 지나갑니다.
바다의 짠 내음 대신 지하의 흙냄새, 먼지 냄새, 곰팡내 같은 것과 케케묵은 공기가 뜨겁게 호흡기를 거머쥡니 다.
숨을 쉬기가 퍽 괴로웠습니다.
목 안이 따끔거리고 피부가 까끌까끌해서,
아! 이대로 죽는 걸까. 싶었을 때,...
손을 뻗어낸 폭스트롯이 당신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 안습니다.
제일 먼저 바닥에 닿은 것이 어디였더라?
퍼억-!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아무튼, 비로소 바닥에 닿았습니다.
꽤 오래 떨어졌건만 어디도 아프지 않았고 제이슨을 감싸고 떨어진 폭스트롯도 어느 곳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제이슨:...! (널브러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당신의 어깨를 잡아 살폈다.)
다쳤어?
폭스트롯:(당황한 얼굴로 슴박이다가 느리게 고개 저었다.) ... 아니. 멀쩡해. 아프지도 않아. 넌? 다쳤어?
제이슨:네가 멀쩡하면 내가 다쳤을 리가... (말 끝을 흐리다, 곧 닿은 손에 힘이 빠져 슬그머니 거두었다.)
폭스트롯:그럼 됐지. 네가 안 다쳤으면 그걸로 된 거야. (읏샤, 소리를 내며 일어나서는 제 옷 툭툭 털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게다가 신발 밑창을 감싸 안는 감각이 부드러웠거든요.
깊은 곳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머리 위는 찬란하고, 시야는 환합니다.
지하 아래에 숨겨진 건……
흰 모래사막입니다.
긴 설명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어디인지 확신했으니까요.
제0구역, 빛이 스며든 사막입니다.
도밍게즈의 동쪽, 해가 뜨는 끄트머 리에 펼쳐진 365일, 24시간 내내 백야가 드리운 소금사막.
물도, 풀도, 사람 만이 아니라 어떤 생명체도 발견된 바 없는 미지의 장소.
이곳을 찍겠노라 길을 떠난, 수많은 젊은이가 무덤도 없이 시체가 되었다지.
제13구역에 떨어진 전적도 있느니만큼 두 번째는 퍽 익숙한 경험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흰 하늘에는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광하는 태양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바닥의 모래는 이미 새하얗게 타버린 지 오래입니다.
사방이 모래밭이고, 숨 막히는 더위가 엄습합니다.
제이슨:
관찰력
기준치:85 42 17
굴림:95
실패
눈앞이 온통 환하고 일렁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뿐입니다.
유진: 저기 좀 보렴. 웬 탑이 있어.
일렁이는 열기 너머로 높게 솟은 탑이 보입니다.
제이슨:이런 벌판에 탑이라고...? (눈을 가늘게 뜨고 탑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탑과의 거리는 상당해 보입니다.
기다란 탑.
열기의 아지랑이는 금방이라도 탑을 삼킬 듯 모습을 흐트려 놓습니다.
제이슨:...여기서 타 죽느니 이동하는 건 어때.
(능력이 있다지만 너무 덥다...)
폭스트롯:그럴까. 나가는 곳도 모르겠고... 13구역에서는 등대였으니... 여기서는 저 탑이 나름의 단서가 되어줄지 누가 알겠어.
얼마나 오래 걷든 간에 모래, 모래, 모래……. 온통 모래 천지입니다.
숨을 쉴 때마다 알갱이가 입안으로 들어오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로 들어온 불청객이 춤을 추듯 몸을 흔들어 댑니다.
탑을 목표로 삼더라도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인 것 처럼요.
아니면 탑이 도망가고 있거나!
주위 풍경도 다 엇비슷해서 얼마나 걸은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정표도, 길잡이도 없이 사막을 헤맵니다.
사막을 헤매는 동안 더위는 덩달아서 제이슨을 괴롭힙니다.
머리 위를 쫓는 태양이 집요 할 지경입니다.
이대로 계속 햇볕을 쬐다간 열사병에 걸릴 거예요.
열을 식히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되지 않습니다.
몸 속에 있지만 통 발현이 되지 않습니다.
제이슨:
행운
기준치:55 27 11
굴림:17
어려운 성공
하늘에서 녹지 않는 흰 눈이 내립니다.
벌어진 입으로 날아 들어온 눈은 달콤합니다.
아, 눈이 아니라 만나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일용할 양식이에요.
갓 구운 빵처럼 말랑 하군요.
때마침 배가 고팠을지도 모릅니다.
제이슨:(이거 진짠가...?)
폭스트롯:(얌... 얌... ... 얌............. 몰래 입에 쏙 넣고 입술 핥았다. ... 맛있네.....)
제이슨:... (얼결에 들어온 알갱이만 쩝 입맛 다시며 음미했다...)
폭스트롯:(하늘에서 내리는 것 두어개 잡아 당신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단 거 좋아하지 않나.
제이슨:...그렇긴 한데. 너무 뜬금없어서 헛걸보나 싶고... (머뭇거리다 받아 입에 냠... 하나 넣고 삼켰다.)
폭스트롯:신의 기적이라고 하지. ... 뭐, 헛것이면 어때. 눈이 즐거우면 그만이잖아.
제이슨:
행운
기준치:55 27 11
굴림:87
실패
푹 발이 아래로 빠집니다.
눈 깜짝할 새 몸이 아래로 떨어집니다.
지반에 구멍이 뻥 뚫린 채, 모래로 메워진 곳을 밟았기 때문입니다.
제이슨:
민첩
기준치:80 40 16
굴림:69
보통 성공
겨우 중심을 잡아 떨어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위험할 뻔 했습니다.
제이슨:(끙...)
폭스트롯:... 괜찮아?
제이슨:...어. 바닥 조심해. 여기저기 비어 있는 것 같으니까.
폭스트롯:붙어서 걷자.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손 슬그머니 내밀었다.)
제이슨:... ... (입만 달싹이나 싶더니 작은 한숨과 함께 손을 얹었다. 내가 뭘 어쩌고 싶은 건지.)
제이슨:
행운
기준치:55 27 11
굴림:48
보통 성공
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모래 사이로 세모난 귀가 툭 튀어나옵니다.
날카로운 눈과 동그란 코를 가진, 사막여우입니다.
0구역에는 생명체가 없는 것 아니던가?
사막여우는 먹을 것이 없는지 제이슨의 근처를 서성거립니다.
제이슨:...배고픈건가? (뭐 주지... 아까 지켜낸 이거라도... 하나 남은 만나를 슬쩍 건네본다.)
만나를 주면 잘 받아 먹곤 다리에 이마를 비빕니다.
그러나 인사를 끝내고 나면 사막여우의 형체는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집니다.
……환상인가?
제이슨:...아. (쓰다듬으려다 허공에 손짓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폭스트롯:(한창 빤히 보이다가... 큼.) 마음에 들었나 봐.
제이슨:(헛손질한 손을 슬그머니 뒤로 돌렸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보니 신기해서.
제이슨:
행운
기준치:55 27 11
굴림:62
실패
폭스트롯:
행운
기준치:70 35 14
굴림:91
실패
폭스트롯의 발끝에 무언가 걸립니다.
딱딱하고, 구멍이 텅 빈…… 결단코, 유쾌한 감각은 아닙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짝 마른 시체가 쓰러져 있습니다.
폭스트롯 발은 시체의 두개골, 정확히는 눈이 있었을 구멍 안에 꽂혀 있습니다.
시체는 살점이 내리고 피는 말 라붙어 거의 뼈만 남은 상태입니다.
군데군데 성한 가죽이 보이긴 합니다.
폭스트롯:
SAN Roll
기준치:80 40 16
굴림:92
실패
폭스트롯:
 
2
폭스트롯:(한숨 푹 내쉬며 마른세수 했다. ... 미쳐버리겠군.)
시체의 옷 또한 헤지고 낡아 신변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겁 없이 제0 구역을 헤매던 젊은이였을까요?
제이슨:... 왜 이런 곳에 시체가... (뒤로 오라는 듯 당신의 옷자락을 약하게 당겼다.)
폭스트롯:(얌전히 당겨져서 뒤로 발 옮겼다.)
제이슨:
관찰력
기준치:85 42 17
굴림:65
보통 성공
품 안에서 [군번줄]을 발견합니다.
제이슨:... (시체에 최대한 닿지 않게 군번줄을 집어 올렸다.)
군번줄에는 신변이 쓰여 있습니다.
Do■in■■ez at 1■, On ■he d■t, ■■e ■th Timer…….
풍화된 탓에 군데군데 글씨가 보이지 않지만, 마지막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타이머라고?
이렇게 형편없는 시체가?
대체 몇 기수지?
얼굴 가죽이 거의 남지 않아 누군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제이슨:타이머...?
왜 타이머가 이런 곳에...
(인상을 쓰곤 손에 들린 군번줄을 당신에게 넘겼다.)
폭스트롯:(가만히 군번줄 받아서 보고 있다가 흠.) ... ... 잘 안 보이네..
영문을 알 수 없는 죽음에 놀라노라면, 다른 타이머마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칩니다.
은수아: 야야야야, 저기 봐. 오벨리스크야!
온통 모래로 가득한 바닥에 시체가 쓰러져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배치 입니다.
흰 바닥과 타이머의 시체.
그는 왜 이곳에 죽어있는가, 온갖 의문 사이로 시선을 들면 바로 앞에 높고 긴 기둥이 보입니다.
그렇게 걸어도 가까워 지지 않더니,
어느새?
몇 발자국 앞에 선 그것은 무척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었는데, 단면은 사각형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처럼 지은 건축물입니다.
입구도, 창문도 없고 벽면을 따라 [글씨]가 잔뜩 조각되어있을 뿐입니다.
표면의 글씨는 도저히 읽을 수 없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자입니다.
태양을 향해 선 것.
아까 누군가 ‘오벨리스크’라고 불렀습니다.
제이슨:
교육
기준치:75 37 15
굴림:4
극단적 성공
아, 그래요.
이런 구조물을 오벨리스크라고 불렀던 것도 같습니다.
태양을 숭배하고 신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우상.
봉헌의 명문을 기록한 기둥.
그리고,
태양이 쨍쨍합니다.
제이슨을 비웃는 것처럼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빛은 오벨리스크의 표면을 따라 흐르다가, 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 모양새가 꼭 시곗바늘처럼 보입니다.
제이슨:
지능
기준치:80 40 16
굴림:81
실패
시곗바늘과 바닥이 마련되었으니 남은 건 숫자뿐이네요.
제이슨:...숫자... 여기에 숫자라곤...
(고민하다가 오벨리스크에 따로 들어가는 곳이 있는지 살펴본다.)
오벨리스크에 들어가는 곳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이슨:...무슨 의미가 있는진 모르겠는데...
여기 각자의 시간대로 서보는 건? 변화가 있다면 좋고 아니면 돌아가든지, 다른 방법을 찾자고.
(그렇게 던져놓고는 폭스트롯의 손을 잡아끌어 5시 방향에 먼저 자리잡는다.)
폭스트롯:... 이해했어. 다들 자신의 시간에 서는 것으로 하자. (끌려가 얌전히 5시 방향에 섰다.)
흰 바닥, 검은 그림자, 그리고 숫자.
세 가지가 모두 모이니 완벽한 시계가 완성됩니다.
0부터 13까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자 총 14개의 시간이 모입니다.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여기에 있었고, 우리는 우리의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퍽 쉬운 일이었습니다.
폭스트롯과 손을 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혹은 조금 떨어진 채.
14명의 타이머와 14명의 카운터가 나란히 자리를 잡자 오벨리스크의 그림자가 한 바퀴를 돌기 시작합니다.
태양의 위치와 상관없이 움직이던 그것은 느린 동작으로 결국 정각에 다가섭니다.
0시이자 12시인 칸입니다.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대신 오벨리스크가 울기 시작합니다.
기다란 것이 몸을 흔 드니 천지가 뒤집히고, 지축이 뒤틀립니다.
제이슨:
SAN Roll
기준치:50 25 10
굴림:74
실패
지진이라도 나는 것처럼 사정없이 사지가 떨립니다.
제자리를 지키기가 퍽 어려웠습니다.
땅은 갈라지지 않았지만, 저 멀리 모래로 쌓은 산등성이가 움푹움푹 꺼져 갑니다.
생리적인 공포가 고개를 듭니다.
진동하는 휴대폰처럼 한참 요란을 떨던 것이 모두 멈추고 나면!
새로운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폭스트롯:(당신 어깨 꾹 잡고 버티는 듯 했다가) 네 말이 맞았네.
제이슨:...뭔가 작위적인 장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뿐이야.
(글씨는 여전히 못 알아볼 내용인가?)
모래 위를 따가운 햇볕이 긁고, 열기가 아지랑이를 피웁니다.
망막에 맺히는 상 은 모두 헛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합니다.
완벽한 형태를 갖춘 환상이 세계를 펼칩니다.
제일 먼저 떨어진 것은 회색 신문이었습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기사의 굵직한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옵니다.
1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흉흉한 기사에 누군가 한숨을 뱉습니다.
“그놈의 멸망, 멸망. 지겹다니까.”
상황이 바뀌고, DOT, 그러니까 하인리히 장교가 책상을 내리칩니다.
하인리히: “카운터를 잃어버리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말이 되건, 되지 못하건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카운터, 반쪽을 잃어버린 세계는 멸망을 향해 가속합니다.
잠깐, 착각하지 마세요.
이것은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곧이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흐렸고, 눈은 칙칙한 회색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피해 삼삼오오 지붕 아래로, 우산 아래로 숨어들었지만, 멸망을 피하려 노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카운터가 없더라도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았던가요?
원하지 않았던가요?
지구의 모습처럼 도밍게즈도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제이슨:...
누군가의 희생 밑에서, 죄악 밑에서 어떤 것도 모르는 평화를 누린 이들이 지구의 이들과 똑같은 것을 겪었으면 좋겠다고.
소리 소문없이 다가온 멸망은 겨울에 임했습니다.
제이슨이 눈을 깜빡이니 세계가 멸망했습니다.
처음 보는 괴물이 누군가의 머리를 꿰뚫고, 목을 꺾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쓰레기처럼 깔아뭉갭니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잔뜩 널려 있습니다.
하늘의 구멍으로부터 다리가 무수히 많거나, 피부가 벌레처럼 단단하거나, 날카로운 이를 가지거나, 거대한 괴물들이 계속 쏟아지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죽음에 이르는 것 뿐이었습니다.
칼 같은 바람이 피부를 저밉니다.
툭하면 눈보라가 시작돼 도망갈 수 없도록 앞길을 막습니다.
거세한 돌풍이 불면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마저 목을 떨구며 지은 이들을 짓누릅니다.
악몽보다 지독한 현실이었습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잡아 먹힙니다.
사람들은 괴물이 보내는 꿈에 시달리며 팔이 떨어지거나, 몸을 꿰뚫리거나, 머리를 잡아 먹히는 꿈을 꿨습니다.
눈을 떠도 꿈은 끝나지 않고, 비참한 현실이 반복됩니다.
괴물이 모독적으로 웁니다.
울음마저 부재한 작은 별에는 죽음만 가득했습니다.
기나긴 겨울이 이어졌고,
인간이 쌓아온 모든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판국 입니다.
보고만 있는데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분명히 도밍게즈란 걸, 제일 처음 본 기사가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태 누리던 평온이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무너졌습니다.
모래가 쏟아지는 속도가 지독히 신속합니다.
목전에 다가온 멸망은 생생했고……
“우리를 구원하소서!”
누군가 단말마를 지르곤 쓰러집니다.
그러나 추위를 피해, 괴물을 피해, 달리고 달려도 형편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식물은 말라 죽고 동물은 얼어 죽으며 물은 썩고 시체는 되살아납니다.
모든 것이 바닥으로 꺼지고 맙니다.
외려, 인간이 멸종하지 않은 것이 더 놀라울 지경입니다.
현실이 무거워,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걸음이 비척거립니다.
그나마 온전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비치고……
폭스트롯: 거짓말.
폭스트롯이 느리게 말을 더듬습니다.
새하야니 불길한 국화가 지천에 가득했습니다.
……직감합니다.
장례식장입니다.
제대로 상복조차 갈아입지 못한 폭스트롯은 여전히 제복 차림이었습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상처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폭스트롯: ... 리베...
무릎으로 기어, 차게 식은 관 앞에 엎드립니다.
아무도 누구라고 설명해주지 않았고, 지독한 환상에 자막 따위 존재하지 않았으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보았던 이었고, 나의 타이머를 지독하게도 닮아있었으므로.
쾌활하게 코를 찡그리며 웃던 미소가 떠오릅니다.
휴대폰 너머로, 혹은 얼굴을 맞대고 듣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제이슨은 제이슨이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없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던 따스함 감도는 무심함과 올곧은 애정이 떠오릅니다.
모든 것을 밀어낼 때 묵묵히 밀려나며 당신의 행복을 바라던 마지막 말을 기억합니다.
……. 고작 7일입니다.
도밍게즈에서 카운터가 떠난 지 7일.
멸망이 도래하고, 종말이 임하기엔 너무 빠른 나날이였습니다.
도밍게즈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타이머의 소중한 이들조차 그러했습니다.
죽음 앞에 예외란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신호였습니다.
암시고, 예언이며, 확신입니다.
카운터가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구원자가 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참담함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뒤집힌 화면에서, 제이슨은 여태까지 중 가장,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낯이 익은 게 아니라······
거울 속에서 늘 보아온 얼굴입니다.
제이슨은 타이머를 붙들고, 기꺼이 어딘가를 찔렀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환상 속의 제이슨은 분명히 그러고 있었습니다.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십니다.
이미 무너진 기둥의 잔해가 바닥에 장난감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제0구역의 오벨리스크, 제1구역의 기상 관측 탑.
제2구역의 높이 솟은 공장의 굴뚝과 제3구역의 세계수라고 불리는 가장 오래된 나무.
제4구역의 시계탑.
제5구역의 녹지 않는 얼음벽과 제6구역의 갈대밭 사이 솟대, 제7구역의 멈추지 않는 풍차.
제8 구역의 화려한 전망대와……. 제9구역의 화이트 루프 꼭대기에 매단 놋뱀.
제10구역 의 더는 작동하지 않는 최초의 우주선과 제11구역의 예언의 탑, 제12구역과 13구역 의 등대까지.
세계를 수호한다는 신의 손가락은 모두 꺾여,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것은 신을 향한 기만이 아니라, 돌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신이 세계를 나누고, 각 세계를 위하여 세운 것을 꺾어야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로소, 이토록 신속히 임한 멸망의 까닭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제이슨이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제이슨이 사랑했던, 나의 운명, 나의 반쪽, 하나뿐인 나의 파트너.
타이머의 피가 제이슨의 손을 타고 흐릅니다.
제이슨보다 더 제이슨과 닮은, 환각 속의 제이슨은 그 피를 무너진 잔해에 덧바릅니다.
붉은 피가 각기 다른 색의 벽돌들을 적시고, 문설주와 인방을 모두 칠한 순간……
장미 향기가 났습니다.
신의 손가락을 꺾고, 구원자의 피를 훔치고서야 내내 찾던, 열고자 했던 그 아치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폭스트롯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가련한 모습이었으나 제이슨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제이슨의 시선은 그곳에서 떼어낼 수 없었는데, 환상 속의 제이슨은 너무나 당연하단 듯이 아치문을 넘어섰습니다.
새파란 장미가 만개했습니다.
때를 모르는, 완벽한 모습입니다.
아! 그 문턱을 넘으면…… 비로소 돌아갈 수 있겠지.
참담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진실을 깨닫습니다.
제이슨:
SAN Roll
기준치:49 24 9
굴림:60
실패
rolling 1d3
(
1
)
=
1
눈을 깜빡이면, 도로시를 쓸어간 태풍처럼 아지랑이는 흔적도 없고 깨끗한 모래가 희고 곱게 누워있을 뿐입니다.
환각에 시달린 머릿속이 어지럽기만 합 니다.
아직 가운데에 놓인 오벨리스크는 건재했으나, 봉헌의 명문만은 달라진 채였습니다.
제이슨:
언어_모국어
기준치:75 37 15
굴림:68
보통 성공
이상한 일이죠.
전혀 모르는 글자였는데, 분명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일은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세계를 창조하는 것처럼, 안식에서 깨어난 신이 능력을 휘젓습니다.
신의 형체도, 존재도 느낄 수 없었으나 눈앞의 일이 증명합니다.
눈 부신 빛과 함께 태양이 순식간에 불타고, 비를 머금은 구름이 섬광을 가립니다.
모래뿐인 바닥에서 순식간에 푸른 장미가 자라나 오벨리스크를, 폭스트롯과 제이슨의 발목을 휘감았습니다.
천둥소리도, 번개의 형상도 없었는데 별처럼 다닥다닥 오벨리스크의 글자들이 조명을 켭니다.
부서진 태양은 떨어지며 눈이 되었습니다.
차가운 가루가 피부에 닿으면 만나처럼 부드럽게 녹습니다.
메추리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메꿉니다.
그 어떤 산 것도 다닐 수 없는 사막에 불길한 새의 지저귐이 깨진 자장가를 연주했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모든 소리를 몰아낸즉 봉헌의 명문이 보입니다.
가장 높은 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모든 것의 진실이었습니다.
옛날 옛적, 신은 두 개의 세계를 빚었습니다.
지구와 도밍게즈를 각각 걸어두니 이계신과 위대한 옛것들은 틈틈이 무너뜨리고 부수며 한입에 삼키려 들었습니다.
세계를 만들고, 지쳐 노쇠한 신은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꺾어 14명의 타이 머와 14명의 타이머를 보냈지만…… 이계의 것들은 더욱 교활했습니다.
그것들은 신이 잠든 사이 신을 흉내내 세계 멸망의 꿈을 전송하고, 멸망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들을 돕는 척 지구의 타이머를 훔쳐다 주었습니다.
방법만 알려주자, 일은 척척 전개되었습니다.
지구의 타이머가 사라진즉 이계의 신들이 배 불리며 포식했습니다.
문득, 악몽에 시달리던 지난 밤이 떠오릅니다.
세계 멸망이란 재난도, 재해도 아니고……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도밍게즈가 불러온, 지구의 멸망이 딱 그랬습니다.
장미가 피어나고, 어둠이 자라납니다.
하늘에 뜬 태양을 검은 그림자가 잡아먹고, 빛이 서린 모든 곳에 밤이 내렸습니다.
모든 것을 읽고 나자 눈앞에 남은 것은 암막뿐이었습니다.
위와 아래를 구별할 수 없었고, 좌우가 헷갈렸습니다.
오로지 실감하는 것이라곤 옆에 선 이의 존재뿐.
신이 직접 이 땅에 던지는 이야기란 어찌 이토록 선명한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다시금 새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새의 형체도, 그림 자도 확인할 수 없으나 소리만이 선명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의 울음이거나, 우리를 위한 자장가였을 것입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뜨자……
그곳은 수도였습니다.
푸른 하늘, 희게 펼쳐진 길, 끈을 엮어 매달아 둔 색색의 깃발과 우산, 그 리고 손수건.
정처 없이 부유하는 풍선과 꽃가루.
완벽하게 아름답고, 완전하게 꾸며져 있던 그 날의 수도. 건국 축제 즈음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너무나 교묘해, 완벽하게 돌아왔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나쁜 꿈을 꿨다고 눈을 돌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신은 도망갈 구석을 두지 않습니다.
수도에는, 오직 사람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건물의 창틀마다 여전히 새파란 장미가 피어있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지다 못 해 질릴 법한 장미 향기가 숨을 틀어막습니다.
불가능과 기적이란 모두 신의 영역.
아치문이란 신의 예비하심을 따라 운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시계탑의 흰 벽에 새겨진 [새파란 글씨]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제이슨:... (시계탑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새파란 글씨를 읽어내렸다.)
분수의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파란 장미는 목이 꺾인 채 가련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주위의 풍경은 모두, 신이 흡족히 여겼을 만큼 아름답기 짝이 없습 니다.
낙원 끝에는 지옥이 있다고 하던가요.
가혹한 선택지를 위장하기에 적격이었습니다.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
시간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폭스트롯:(시계탑의 글씨 가만히 눈에 담았다.) ... 돌아가. 확실한 방법을 알았잖아.
제이슨:... (아직도 환각을 곱씹는 듯 말없이 글씨만을 눈에 담는다. 바라 마지 않았다 여기며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는데. 구태여 의미없는 것을 묻고 싶어지는 제가 우습고, 곁에 선 이도 닮아 이상하게만 여겨졌다. 끔찍한 것과 동시에.)
...너도 같은 걸 봤어?
폭스트롯:네가 무엇을 봤는지 난 몰라. 단지 내가 본 것은, 네가 소중하게 여기던 이들이 아직 살아서... 나를 보며 네 이름을 부르던 것 뿐이었지.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 네가 원하던 일 아니었나? ... 지금 당장은 죽지 않겠더라. 지키는 이가 있던걸.
제이슨:(누군가에게는 반대의 희망이며 제게는 희망조차 없는 바닥을 보여준 이유가 무언가. 역시 돌아가라고? 혹은... 우리에게 각자가 바라던 것을 보여준 걸 수도 있겠지. 그렇게 악의를 내비치면서도 네 진심을 의심한 적은 없으니.)
내가 본 건... 내가 떠나고 네 소중한 사람들이 주검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어. 너는 그 앞에서 식은 몸을 붙잡고, 그 곁에 나는 보이지 않은 지도 오래됐지...
... 궁금한 게 있어. 넌... 내가 정말로 돌아가기를 원해?
돌아가야 해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뒷 말은 더 붙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폭스트롯:그렇구나. 그런 것을 봤구나. 너무, ...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소중한 이들은 모두 타인을 지키는 업을 지닌 이들이야. ... 게다가, ... 제이슨. 이것이야말로 네가 원하던 것 아니었어? (조용히 그리 뱉었다.) ... 나 또한 너처럼 사랑하는 것들 잃는 아픔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것. 진심이 아니었나? (이를 꾹 물었다. 지금까지 부정만 하던 것을 내뱉으니 금방이라도 눈가 뜨거워져서.)
응. 돌아갔으면 해. 돌아가서... 네가 소중한 이들과 손 맞잡으며 기뻐하고 웃음 지었으면 좋겠다. 돌아가야 해서, 가 아니야. 넌, 내가 없는 곳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나아. 그곳은 너를 위해주는 이들이 있고... 혼자가 아닐 거잖아. 외롭지 않을 테고... 밤에 눈을 뜨면 곁에 있어주는 이가 있겠지.
매번 말하지만... 멸망이 죄악을 저지른 이들이 받아야 할 벌이라면, 난 이것이 옳다고 생각해.
네가 신경을 써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야.
제이슨:...알고 싶었어. 나는 네가 아팠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것을 잃어보고 고립되었으면 좋겠어. 손도 닿지 않는 곳에서 무력감을 느꼈으면 좋겠어. ...그래서, 네 진심은 그때와 조금 달라졌을까 싶었거든.
(글씨에서 눈을 떼고 조용히 당신을 응시했다.) ...넌 끝까지 내 행복을 위해서라는 대답만 하는군. 이젠 내가 바라는 게 네 불행인지, 단순히 도밍게즈의 멸망인지, 온전히 너를 위한 네 욕심을 목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결정은 내린 지 오래야. 사실은 이미 널 미워할 힘도 더 남아있지 않아. ...너는 나를 잊을 수 있을까. 차라리 네 것들을 지키면서 평생을 떠올려 날 원망하는 쪽이 그럴 듯 할 텐데. 아마 그러지 않겠지. (항상 볼 때마다 외면하던 것이 눈 앞에 있었다. 내가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이를 저주 속에 묻어 시들게 하는 것이 제 것 또한 상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감정의 잔여는 남지 않았음에도. 차라리 여전히 사랑할 수 있었다면 달랐을까. 아마 많은 것이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이 곳과 우리 둘 건사하면 그만이라 여겨 모른 척 네 구원자 행세를 돕기도 했겠지.)
널 함께 돌아가도록 하는 게 최악의 복수겠지만.. 도밍게즈에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붙들고 살아. 네가 곱게 보낸 카운터 때문에 위태로워진 사람들 붙들고, 날 생각하면서.
어차피 이제 날 좋아하지도 않겠지... ...넌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이미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폭스트롯:많이 아플 거야. 많이 아프고, 슬프고, 절망스럽겠지만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으니 떠밀려서라도 걸음 해야겠지. 내 앞에서 스러지는 생도 있을 거고, 내가 없는 저 먼 곳에서 스러져 명 달리하는 이들도 많을 것임을 알아. ... 내가, 그때와 달라질 수 있을까? 네가 원하는만큼 아플 수 있을지... 혹 네가 원하는 만큼 아파하지 않는 것이 걸릴 뿐이야.
그야, ... (무언가 입을 떼려다가 다물었다. 나의 사랑은 입에 앓는 소리 물고 보내주는 것이라고. 내 사랑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고. 쓴 미소 지어냈다. ... 아프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그 모두를 원하도록 해. 그럴 자격이 있잖아.
널 평생 잊지 못하겠지. 나의 인생에 있어서 너보다 더 큰 흔적을 남긴 이는 거의 없다고 하여도 만무하니. 영원히 네 행복만을 바라며 살게. 걱정 마. 네가 말한 것은 무수한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을 테니까. 네가 뱉은 말ㄷ르은 이미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되었고, 이는 나의 일부나 다름이 없어. (네가 준 상처들마저 지금에서는 애틋하여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네가 내게 준 것이 무엇이든 내가 어떻게 거부 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독배라 한들 난 기껍게 웃음 지으며 받았겠지.)
영원히 널 사랑한다고 맹세 했고 ...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약속과 맹세를 어긴 적 없어. 난, 이 순간에도 제이슨 리드 데이라이트라는 이를 사랑하고 이는 변함 없을 나의 맹세야. 네가 있었기에 난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금 배웠다. ... 네가 알려준 거야. (순수한 애정 담아 올곧은 시선이었다. 이전의 수줍은 붉은 홍조가 얼굴 휘어 감는다.) 네가 후회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 지난 날을 후회하며 사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잖아.
최초에 낙원이 있다면 이런 곳이었을까.
고요한 광경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을 선포 한 신이 왜 이런 공간을 조성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이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이별의 슬픔을 나누란 뜻이었을까요.
유난히 시간이 더디게 흐릅니다.
장미가 피고 지는 날들이었습니다.
선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원하던 것은 확실히 정해져 있었으니.
그렇지 않나요, 제이슨?
제이슨:...후회한다면 그것도 한때 네 불행을 바랐던 내 업보겠지. (이제 가야 할 곳은...)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실은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 이야기와 이야기 가 팽팽하게 부딪혔다 나가떨어지길 반복합니다.
세상의 이치를 따라, 모름지기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먼저 포기하고, 손을 놓았다면 내 사랑이 더 무거워서일까, 내 슬픔이 더 가벼워서일까.
아니면… 이전부터 상대를 완전히 놓아버린 것인지.
눈치 게임은 치열했습니다.
선택을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고집을 꺾는 것은 더 어려워서……
너덜너덜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겪은 일련의 사건이, 이편의 나와 저편의 네가, 사이에 쌓인 모든 것들은 운명이라기엔 너무 가혹했으니까.
선택을 종용하던 신은 다시금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놓아주 거나 구름을 타지도 않고, 빛나는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어요.
천둥과 우레 같은 목소리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굉장히, 재수 없는 방식입니다.
환상 은 천천히 부서졌습니다.
머리 위에서부터 하늘이 조각나고 구름이 찢어집니다.
새파란 모든 것들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면 검은 하늘이 드러납니다.
달도 별도 뜨지 않고 구름도 잠잠한 저녁.
모든 것이 부서졌을 때, 계단을 오르지도, 절벽에 매달리지도 않았으나 우리는 또다시 싱크홀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건조한 바람이 불고, 장미 향기 대신 탄내와 잿가루가 휘날립니다.
불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타들어 간 탓에 그을린 냄새는 통 가시질 않았습니다.
“제이슨!”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낯익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하나, 둘……. 묻지 않아도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구원자의, 머릿수를, 헤아리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제12구역으로 돌아왔을 때와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하인리히: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싱크홀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말랬잖아! 아니, 애당초, 복구 작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단체로 어딜……
꿱꿱거리는 목소리가 멀게 들립니다.
듣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우리의 부재는 들통났다는 것.
그때 운전사는 조금도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불렀잖아.
하인리히 장교처럼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겁먹거나 식은땀을 흘리지도 않았었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불현듯 고민에 빠졌을 때,
하인리히: 하루종일 사라진 탓에 온 구역이 뒤집혔어!
하인리히 장교가 호통을 칩니다.
사실인 모양입니다.
하인리히 장교의 옆에는 항상 붙어 있던 리슬러 부관 대신 처음 보는 사람들뿐이었거든요.
군복은 아니니 구역의 정치인쯤 될까요.
초조한 기색을 갈무리하고, 하인리히 장교가 큰 보폭으로 다가옵니다.
하인리히: 언제나 구원자의 사명을 가장 앞에 두라고 하지 않았나. 다들 복귀해. 화재는 다 진압했으니 복구 작업만 남았어. 얼마 걸리지 않겠지. 제2시와 제3시 페어는 나와 함께 가고, 제0시는 제13시와 함께 폐기장으로 움직이게.
한 걸음,
하인리히: 제1시는 호수 아래 수몰된 시체가 있는지 찾아볼 예정이니 경찰에게 협조하고, 혹시 모르니 제5시와 제10시 페어가 합류해서 지원하도록. 제4시는 전력 센터부터 찾아가보게. 제6시는 내일 동물 보호소에서 출동한다고 하니 숲에 남은 개체가 있나 확인해보고.
두 걸음,
하인리히: 제7시는 다시 불씨가 일지 않게끔…… 아니, 차라리 함께 가는 게 낫겠군. 제8시, 제9시 페어는 잊지 말고 대피소에 방문해. 안정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 이 한 둘이 아니야. 제11시, 제12시는 방화 의혹 용의자들 대면하고,
그리고 정확히 세 걸음을 내디뎠을 때.
커다란 굉음이 지나갑니다.
컴컴한 하늘이 희게 점멸하고, 요란한 비명이 머릿속의 뇌수를 흔들었습니다.
먹구름은커녕 구름 한 점 없었는데, 정말로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었습니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린 것처럼 눈앞이 화려하게 번쩍이고,
다시금 눈을 뜨자 건물과 건물 사이, 바닥이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아니, 아니야.
일렁이는 것은 바닥 따위가 아닙니다.
그림자에서 솟아난 것처럼, 순식간에 등장한 ‘어떤 괴물’의 잔상이었습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이글거리는 눈, 박동하는 푸른 피부를 가진 그것은 무척 흉측하게 생겼습니다.
옛적에 멸종한 공룡의 사체가 지금 돌아다닌 다면 이렇게 생겼을까요?
틴달로스의 사냥개 입니다.
제이슨:
SAN Roll
기준치:48 24 9
굴림:26
보통 성공
제이슨:
rolling 1d3
(
1
)
=
1
이계의 공포.
환각 속에서 계속해서 보았던 괴물 중 하나입니다.
틴달로스의 사냥개가 이를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하인리히 장교의 머리가 사라집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 정확하게 목덜미를 찢고, 머리를 훔쳤으니까.
이빨과 머리를 잃은 시체를 타고 푸르고 붉은 점액질이 쉼 없이 흘러넘칩니다.
낯익은 군복과 그을린 땅마저 모두 울긋불긋하게 물듭니다.
쇠 비린내가 훅 끼칩니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그 악취는 죽음이었습니다.
숨구멍을 턱 막는 끔찍한 감각입니다.
근처에 서 있던 노친네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달아났습니다.
아니.
쓰러진 이들과 달아나던 이들의 목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피분수가 이어집니다.
대체 누가?
물을 것도 없습니다.
틴달로스의 사냥개가 장교의 머리를 물어 뜯는 것과 동시에 폭스트롯이 들고 있던 얼음의 창으로 그들의 목을 쳤으니까요.
표정은 평온합니다.
오히려 그 눈은 더욱 빛나는 듯 합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단죄의 형벌을.
죄인을 심판한 구원자는 창을 휘둘러 묻은 피를 바닥에 뿌립니다.
풍겨지는 비릿한 향에 생각을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틴달로스의 사냥개가 머리를 먹어치울 때마다 우득, 우드득. 섬뜩한 소리가 들립니다.
퉤, 어디의 것인지 모를 뼈를 뱉은 괴물은 제이슨을 바라봅니다.
입맛을 다시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할 일을 마친 듯 사라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자신만만하던 남자와 죄악에 동조했던 이들은 머리를 잃고 쓰러집니다.
비참한 말로였으나, 저지른 죗값에 비하면 가벼운 징벌이었습니다.
피가 바닥을 적십니다.
붉고 어둡게 물들어, 저주받고 있습니다.
젖은 흙이 축축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고,
제이슨:
관찰력
기준치:85 42 17
굴림:10
극단적 성공
유리의 벽면을 타고 부드러운 모래가 떨어집니다.
뜬금없이 시야를 사로잡은 모래시계는 고개를 돌려도, 젖혀도, 숙이거나 휘저어도 끊임없이 쫓아옵니다.
피에 젖지 않은, 가장 곱고 순결한 흰색이었습니다.
떨어지는 소리가 사르륵, 귓속을 파고듭니다.
무엇을 향해 떨어지는지, 모를 수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로 밝혀진 하인리히 장교의 사인은 ‘사고사’입니다.
재해 구역을 돕기 위해 기꺼이 현장에 나섰다 무너지는 건물 잔해에 꿰뚫려 죽었다는군요.
뉴스는 떠들썩하고, 신문은 시끄럽습니다.
호외요!
분명히 대단한 사건·사고이긴 하죠.
2구역의 화재가 일단락되었으므로 하인리히 장교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타이머와 카운터는 수도로 돌아옵니다.
DOT의 이들은 하인리히 장교가 아닌 폭스트롯을 바라봅니다.
지난 8년간의 성과는 빛을 발했습니다.
장례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으나 타이머와 카운터에게 내려진 지시사항은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타이머들이 분주하게 찢어져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도밍게즈의 구원이었고 그들이 카운터에 대해 결심한 것은 7년 전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든, 그 결과 도밍게즈가 멸망에 치닫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밍게즈가 짊어져야 할 무지의 평화에 대한 죄값입니다.
결과적으로 현 세대의 타이머들을 잃게 되어 세대 교체가 된다고 하더라도!
닥쳐올 종말을 모르는 도밍게즈는 평온하고, 평화롭습니다.
곳곳에서 하인리히 장교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 행렬이 이어집니다.
타이머들이 없는 순간, 남은 것은 카운터라고 불리는 지구의 타이머들 뿐입니다.
돌아갈 준비를 합시다.
남길 것이 있나요?
혹은 떼어낼 것이 있나요?
지구로 품고 갈 것은 기억만으로 충분하다면야.
제이슨:(이미 몇 년 전에 남길 것은 그가 모조리 가져갔으니, 남은 것은...)
(제복 주머니에 든, 조금은 작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다 더 쑤셔넣었다. 있지 않은 기억의 잔재나마 보면 생각이 날까.)
분홍빛의 조개가 다른 파츠와 마찰되어 달그락 거립니다.
타이머들이 카운터들의 앞에 도착한 것은 초저녁이 되어서였을 겁니다.
근 7년간 지겹도록 마주한 얼굴입니다.
구원자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무게와 사명감에 짓눌린 피로함이 가득한 얼굴이죠.
동시에 무엇보다 빛나는 눈동자가 대비 됩니다.
그들의 존재 가치는 구원자라는 이름에서 나오기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이 저물고 있습니다.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흰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그려진 남색 천장,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붓의 흐름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섬세하게 회칠을 한 벽.
본관은 언제나 그렇듯 흠 없고, 점 없이 완벽하기만 합니다.
그 입구에 서서,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은 만남이 아니라 이별일 뿐입니다.
이대로 문을 나서면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이 있겠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인연들이 있겠지.
놓아줘서, 영원히 타인이 되어야 할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열렸건, 열리지 않았건, 결국 문은 닫히고 모래는 바닥을 칩니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제이슨은 모릅니다.
떨어진 것들은 저편을 볼 수 없으니까요.
이별이란 이 별을 떠나는 것.

설사 멸망이 도래한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조차 없겠지.
새파란 장미가 어둠 속으로 머리를 떨구고, 꽃잎을 토합니다.
지독하게 평 화로운 순간이었습니다.
세계는 이별을 알지 못하는 척 선명한 하늘을 드리웁니다.
비가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곧 찾아올 여름을 증거하듯 바람만 후덥지근했습니다.
가장 높이 솟은 것 아래에서 서로 마주보고 섭니다.
오늘만큼 폭스트롯이 낯설거나, 멀게 느껴진 적은 처음입니다.
시선은 한참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배회합니다.
이별밖에 남지 않았으니 망설여지는 건 당연한 수순일 테죠.
자, 피를 볼 시간입니다.
반항하지 않는 이에게 무기를 향하도록 합시다.
제이슨:... (기껏 만들어 쥔 얼음 날을 들고 가만히 서서 침묵했다.)
(불행하라면 불행하고, 상처를 내달라면 내고... 역시 그 사랑이란 것 앞에서 너무 스스로가 바닥을 보이고 만 인간 같아 망설임이 길어진다.) ...이게 마지막이야. 내가 네게 뭔가를 바라는 건.
(팔을 내밀어 보라는 듯 당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폭스트롯:이후에는 바란다 한들 내가 들어줄 수 없네. ...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순순히 제 손 들어 팔 내밀었다.) 벽을 잔해로 만들려면 꽤 클 거야. 덧바를 수 있으려나.
제이슨:... 크게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알아서 금방 고칠 거라 믿지. 네가 바라는 미래 때문에라도. (한쪽 팔에 차가운 날을 갖다대고는 제 입술을 미약하게 물었다.) ...
나는 네가 원하는 것 이루어 놓을 생각이야. 네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서, 소중한 사람들과 매 순간을 기쁘게 살고, 외롭지 않을 거고... 그리고...
(결심한 듯 손에 힘을 주어 팔을 관통하듯 깊게 찔러넣는다. 살이 뚫리는 감각 때문인지, 이어갈 말 때문인지 모르게 턱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꾹 다물었다.) ...
...넌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지. 난 그럴 수 없어. 네게 그걸 주고 나면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몇 년이 지나 그제야 건네는 말이 무색했다.) ...미안해.
(점점 배어나오는 피를 보고도, 손바닥으로 상처를 가린 채 그렇게 서 있었다.)
폭스트롯:과다출혈로 죽을 생각은 없으니 그리 할 거다. ... 여기서 죽어버리면 네가 바라는 것도 이룰 수 없으니까. (팔 뚫리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미간 찌푸렸으나 이마저도 감내한다. 입꼬리 당겨 웃음 내걸었다.) 부디 네가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았으면 해. 꽤 무겁더라. 이건 단순히 돌아갈 길을 만드는 방법일 뿐이잖아.
(떨어지는 핏방울에 당신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건드리지 마, 라는 것처럼.) 네가 날 사랑한다 했으면 난 널 잡고 싶어졌을지도 몰라. ...다행이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서.
사과하지 마. 넌 매 순간 기쁘게 살고 외롭지 않으며... 행복하기만 해.
... 네가 원하는 이들에게서 원하는 것 이상의 사랑을 받고 지내.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야.
폭스트롯의 어딘가를 찔러, 기어코 피를 봅니다.
가장 높이 솟은 것을 무너뜨리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피 냄새가 짙어서, 평생이 지나도 이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무너 뜨리고 부서뜨리면……
사막에서 보았던 환상이 스쳐지납니다.
감히 신의 손가락도 꺾고 구원자를 피 흘렸으니 어찌 세계가 온전하리오.
피에 젖었는데 쇠비린내 라곤 전혀 없습니다.
가장 높이 솟은 것이, 처음부터 존재 하지 않았던 것처럼 썩어들어, 땅 아래로 자취를 감추면……
눈앞에 문이 열립니다.
철제를 두르고 피어난 새파란 장미는 기적과 불가능의 상징.
도저히 장미 향기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을 예고하는 것처럼 진해지고, 덧칠해집니다.
문 너머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제이슨은 그래도, 건너가야 합니다.
이 문을 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완전히 이별하겠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나와 같은 시간을 사는 이를 돌아봅니다.
울었나요?
혹은 웃었던가요.
눈앞이 흐릿해서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인데.
선명하게 보아두어야 하는데.
이제 돌아가면 영영, 다시는 볼 수 없을 텐데……
폭스트롯의 얼굴이 흐려집니다.
하고 싶은 말은 밤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무수히 많지만……
“안녕.”
이별하는 처지에, 이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습니다.
언젠가 내가 머물게 된다면…… 꼭 당신 곁이리라고 믿었던 때가 있어요.
나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시간은 흐릅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입니다.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숙여,
나는 다시금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걸어 나아갑니다.
제이슨:
SAN Roll
기준치:47 23 9
굴림:18
어려운 성공
한 걸음, 폐부를 가득 채우는 푸른 장미의 향.
머리 속에서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안녕? 네가 내 심장의 반쪽이구나.”
그리 말하며 웃음을 짓는 앳된 얼굴이 떠오릅니다.
함께 손을 잡고 DOT 이곳저곳을 다니던 순간.
눈에 띄게 붉어져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모아 얼굴을 가려내던 순간.
한 걸음씩 떼어낼 때마다 잊은 기억을 돌려주겠다는 듯 사라졌던 이전의 기억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마에 입 맞추고 끌어안고 잠들던 나날들.
능력을 되돌리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서로를 품에 넣고 입을 맞춘 일.
잠시 떨어졌다는 이유로 올라오는 살해욕구를 참아내다 터진 일.
누구도 없는 폐성당에서 같은 반지를 끼고 사랑을 속삭이던 일.
함께 아쿠아리움에 가 뽑은 인형을 품에 안고 팔찌를 만들어주던 일.
예식장에서 흰 턱시도를 빼입고 영원을 입에 올리며 맹세를 하던 일.
그리고, 피를 닦을 사이도 없이 당신의 안위를 살피던…
아, 그래요.
모든 기억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잃었던 기억이 돌아오며 머리를, 가슴을 어지럽힙니다.
제이슨:
SAN Roll
기준치:47 23 9
굴림:91
실패
제이슨:
rolling 1d3
(
3
)
=
3
돌아보지 말아요.
참상을 돌아본다 한들 돌이킬 수 있는 힘은 없으니까.
다시 따스하게 손을 맞잡고 품에 안으며 입을 맞출 수 없으니까.
다시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없으니까.
네가, 원하지 않을 테니까.
눈이 마주쳤다간 애원하게 될 것 같았어.
날 보내지 말라고, 네 곁에 있고 싶다고……
저주받고 멸망할지언정, 그것만을 바란다고.
사무치게 사랑하니 이별 또한 가슴 깊이 사무칩니다.
가장 사랑한 것을 두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위하여 옮기는 그 걸음은, 진정으로 구원자의 순례였습니다.
시계바늘은 다시금 돌고 돌아, 자정이 지나면 정오를, 정오가 지나면 자정 을 가리키겠지.
14개의 숫자는 낮과 밤에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해가 달을 쫓고 달이 해를 좇아 넓은 하늘을 헤엄치듯이, 우리도 서로를 좇으며 우주를 헤매게 될 거예요.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혹사당한 탓에, 꼭대기에 걸린 달이 앙상했습니다.
섭리를 따라,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